귀양의 역사

귀양의 역사


“귀양”이라는 이름은 명나라(홍치)의《귀주도경신지(贵州图经新志)》에 비교적 일찍 나타났는데 군은 귀산의 양(阳)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귀양은 귀산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귀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귀양은 고대에 대나무를 많이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죽”의 동음인 “축”을 귀양의 약자로 사용하였다.

하나는 귀양의 기후는 일년 내내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리므로 민간에서는 “맑은 날이 사흘도 안 된다” 라는 속담이 있으며 귀양은 “양귀”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하나는 이곳의 지명은 귀산에서 유래된것이고 산의 남쪽은 양이라 하여 귀양이라고 부르기때문이다.

귀양의 이름은 귀산에서 유래되었고 귀산은 귀인봉이라고도 불리며 귀양은 귀산의 양(阳)에 의해 이름을 얻었지만 귀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항상 논란이 있었다.
명홍치(明弘治) 14년 (1501년) 판
《귀주도경신지(贵州图经新志)》에는 “군은 귀산의 양에서 있고
따라서 귀양이라 부른다”, “귀산은 치성북(治城北) 2리에 있다”, “백애산은 귀산 기슭에
있다”, “백애산은 치성북 2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명승지(名胜志)》에는”성북2리에 귀산,촉도소경(蜀道所经), 귀인봉이 있다”고
적혀 있다. 강희(康熙) 31년 (1692년)의
《귀주통지(贵州通志)》에는 귀산은 성이북의 5리라고 명기하였고 상응한 지도에는 귀산은 귀양성의 동북쪽, 즉 차땐(茶店)북쪽의 양류정(杨柳井)의 옥마산(玉马山)이라고 표기하였다. 1697년에 편집한 《신보 강희귀주통지(新补康熙贵州通志)》에는 귀산이 성북5리에 있다는 기록도 있다. 《귀양 향토지리(贵阳乡土地理)》에는”봉황산의
남쪽, 차땐(茶店)북쪽에 일예봉이 솟아 있어 귀산”이라고 적혀 있다. 《귀양부지(贵阳府志)》에는 “성12리에 가면 锐峰岌嶪,秀插层宵,전하는데 의하면 귀주이름은 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속에는 구멍이 있고 기슭에는 구십구천이 있다.